모두 바삐 휴가를 떠나는 휴가철이 왔다. 극성수기 중에서도 초극성수기. 다들 삼삼오오 가족들을 데리고 편한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기간이기에 산에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 생각하며 즐거워했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등산에 진심인 민족이었는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채.
산행일자: 2024. 7. 31
등산코스: 장구목이골입구 ~ 이끼폭포 ~ 장구목이 임도 ~ 정상 ~ 원점회귀
난이도: 중상
거리: 왕복 14km
시간: 6시간 (휴식시간 포함)
주차: 장구목이골입구 갓길주차. 강원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산 400-22
새벽 6시. 그간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해야겠다는듯 새벽 늦게까지 자지 않고 놀아서 수면시간이 4시간 정도밖에 안되었다.
'몸이 천근만근인데 가지말까? 아냐, 그래도 이 때 아니면 또 언제 큰 산을 오르겠어. 그리고 부족한 잠은 갔다와서 자면 되지.'
주말에 일정들이 많아지면서 한달에 1회 큰 산을 오를까 말까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주1회 1산은 기본이고 2산도 올랐었는데. 다시 그런 시간적 여유가 생기길 바라며 고군분투중이다.
피곤함으로 인해 마음 속에서 갈까 말까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일단 가기로 결정하니 한결 홀가분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으니...
핸드폰을 켜 네비를 찍고난 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3시간 50분...?'
잠들기 전 확인했던 시간은 2시간 반. 7시쯤 출발하면 9시 반쯤 도착하니 여유롭게 산행하겠다~는 계획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그냥 가지말까. 마음 속에 한번 더 갈등이 올라왔지만, 결정은 결정. 그냥 일단 가보기로 했다. 4시간 가까이 운전 후 몸이 너무 피곤하면 굳이 정상까지 가지 말고 그냥 즐기다가 오자, 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중간에 휴게소를 두 번 들렀지만, 그 동안 도로에 차가 많이 빠져서 다행히 총 운전시간은 4시간을 넘지 않았다. 10시 50분. 그러나 한산할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차가 빽빽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아니 휴가철인데 왜 다들 가족이랑 안 보내시고... 하긴, 내가 할 소린 아니구나. 이제 곧 하루 중 제일 더워지는 시간이 될 거다. 서둘러야겠다.
그리고 나는 들머리에 들어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저는 어디로 갔을까요? 1번길 또는 2번길
사진을 다시 봐도 헷갈리네.
나는 왼쪽길로 들어섰다. 오른쪽이 들머리라는 표시판이 있었지만, 못 보고 지나쳤다. 게다가 내 눈엔 왼쪽길이 더 길처럼 생긴데다 그쪽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홀리듯 길을 이탈해버렸다. (아니면 오른쪽 길이 오르막이라 무의식적으로 피한 걸수도 😅)
덕분에 이끼계곡과 처음으로 조우했다. 계곡 부근 나무에 이끼가 많이 껴 있는 광경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많은 이끼가 바위를 잠식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건너서 갈 만한 길이 없다. 바위도 미끄럽고, 반대편으로 가는 길도 없어보인다. 이 때 여기가 길이 아님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강원도 산, 하면 험준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터라 다들 알아서 가나보다하며 미련하게 바위 위를 오르다가 미련하게 발을 헛디뎌 본의 아니게 등산화와 양말을 계곡물에 흠뻑 적셔버렸다. 다행히 고어텍스여서 마르긴 금방 말랐다. 4계절 내내 두꺼운 가죽 고어텍스 신고 다니는 사람, 그건 바로 나 ㅎㅎ
아등바등 다시 바위 위로 올라와보니 그럼 그렇지. 나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었는지 정규등산로와 합류하는 좁은 길을 발견했다. 다행이다.
이미 사람들이 올라간건지, 내 뒤에 산객이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걷는다. 옆에 계곡물이 쏴아아 떨어지는 소리만 끊임없이 들린다.
고사리가 가득한 좁은 길을 걸으니 한국이 아니라 어디 이름 모를 원시림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계곡의 습기로 인해 산 냄새가 더욱 진동한다. 바닥은 진흙 투성이다. 가느다란 긴 다리를 가진 거미들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한동안 한발 한발 집중하며 끝없이 오르막길을 걷는다. 더운 공기가 폐 안으로 훅훅 치고 들어온다. 숨이 점차 가빠지니 이내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깨끗해진다.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도, 신경 쓸 이유도 없어진다. 나는 이 기분을 맛보러 산을 계속 찾는 것 같다. 시끄러워진 머릿속이 정리되고 어깨 위에 얹혀진 보이지 않는 근심을 날려버리는 기분이랄까.
계곡은 대부분 나무에 가려져 있지만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청량한 바람을 선사해준다. 뜻밖의 응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정말 사진을 맛깔나게 잘 찍으시는 분들 많던데, 내 사진은 실물의 아름다움을 1/10도 못 담은 것 같아 너무 아쉽다. 제9폭은 물의 시원함은 차원이 다르다. 발을 오래 담그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얼음장이다. 세수를 하니 갑자기 시베리아 한기를 만난 듯 온 몸의 더운 기가 단숨에 싹 가셔진 느낌이었다.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일단 정상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다음에 또 4시간 운전하고 와야하는데... 어우 노노...
제9폭을 지난 후 길이 계곡과 점점 멀어진다. 길 또한 갑자기 가팔라졌다. 장구목이코스는 평지가 거의 없는 끊임없는 오르막의 연속인데 계곡과 멀어진 후 경사까지 심해지니 더 죽을 맛이다. 살이 쪄서 몸이 무거워진 탓인가?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인가? 그러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둘 다란 것을...😂
개인적으로 설악산 오색코스보다 더 힘들다고 느꼈다. 오색은 중간 중간 쉼터가 있지만 여긴 그런 게 거의 없이 야생의 맛이 살아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드디어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여쭈니 웃으며 '앞으로 한창 더 많이 올라가야 할텐데~' 하신다. 실환가?
와 이거 생각보다 장난 아니네... 할때쯤 장구목이 임도길이 나왔다. 빽빽한 숲에 가려져 있던 하늘이 이제서야 말끔한 여름의 얼굴을 보여준다.
정상까지 이제 한 40분 정도 남은 것 같다. 가져온 물병 3개 중에 두 개는 이미 깨끗이 비워진 상태다. 생각보다 물을 많이 마셔버렸다. 아이고... 어쩔 수 없네. 업힐할 때 무릎 강화해야 한다며 등산스틱을 쓰지 않는 나지만, 물이 부족한 상황이라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야 하기에 스틱을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근데 왠걸, Z폴 등산스틱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너무 뻑뻑하다. 그것도 양 쪽 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약간 당황했지만 바위에 툭툭 치며 억지로 끼워넣었다. AS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이제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다.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을 때 주목 군락지를 지나친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별칭을 가진 나무. 카리스마 넘치는 이름에 생김새도 멋지고 신비롭다. 왠지 나쁜 액운이 있으면 모두 다 박멸시켜줄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진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법한 빽빽한 숲길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듯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 정말 다 왔구나. 없던 힘이 갑자기 생기는 것 같다. 가리왕산의 정상은 어떤 곳일까. 마음 속에 호기심과 약간의 기대감이 차오른다.
사실 가리왕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군사시설에 포함되어 있어 민간인이 접근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도 이곳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곳이니. 산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탁 트인 정상의 경치를 맛본다. 사방에 웅장하고 커다란 산들이 있어 눈이 즐겁다. 더위를 식혀주는 선선한 바람이 가을이 오고있음을 알린다.
산에선 계절의 변화가 오감으로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을 멈추고 한 발자국 씩 나아가며 감각에 집중하다보면 무언가가 비워지며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번 산행도 조금은 맑아진 기분으로 마무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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